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카의 역사 정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카를 비판하는데 동원한 논리는 '언어로의 전환(Linguistic Turn)이다. 이전의 역사학이 과거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학을 정의해온 것에 비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거 사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매개체로서의 언어에 비중을 두었다. 언어로의 전환이란 역사의 연구 대상이었던 과거 사실에서 그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로 관심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언어를 기호로 파악했다. 그의 언어이론에 따르면 모든 단어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로 이루어 진다. 기표는 기호의 겉모습, 즉 음성이나 문자로 표현된 모습을 의미하고 기의는 기호 안에 담긴 의미를 말한다. 1
그런데 기표와 기의는 무조건 1대 1로 대응하지 않는다. '동물'이라는 기표는 호랑이, 사자, 원숭이 등 수많은 특성을 가진 여러 개체의 특성 중 유사한 것을 모아 범주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 호랑이를 보고 동물이라고 해도 되지만 원숭이를 보고 동물이라고 해도 된다. 각각의 개체는 분명 독립적이고 개별적이지만 기표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찾아내서 분류한다. 언어관습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면 호랑이를 고양이로 분류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즉 기표는 개별적인 실재를 가리키는게 아니라 개별적인 실재의 부분 유사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이름등 특정 대상을 표상하는 대명사로서의 기표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표만으로는 문장을 구성할 수 없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하나의 기의에 무조건 하나의 기표가 대응하는 것이아니다. 뿐만 아니라 특성을 추상화하고 유사한 부분을 판단해 만들어지는 기표는 인간의 경험에 의한 일반화의 과정을 거친다.
언어를 통해 과거 사실을 본다는 것은 색유리를 끼고 왜곡된 색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즉 과거의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한 것이다.
카는 객관적인 과거 사실이 부분적이나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보는 각도와 관점에 따라서 산의 모양이 다르게 나타나더라도 상상적 이해를 통하면 부분적인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언어로의 전환은 카의 이러한 주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사실의 객관성이란 지식적인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언어를 통해 남겨진 사료는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의 행렬일 뿐이다. 사료는 실재를 기표와 연결하는 기호작업의 결과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사료를 실재의 의미화라는 뜻에서 텍스트라고 부른다. 사료는 저자가 의미화한 자료이며 다른사람들에게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자료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텍스트라는 용어가 등장하자 사료에 국한되었던 역사 연구 대상이 그 시대가 남긴 모든것들로 확대 되었다. 건물, 그림, 조각, 의복, 가구, 낙서, 의식, 경향, 이미지, 상징등 거의 모든것들이 역사 역구의 텍스트로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언어로 작성된 텍스트는 저자의 개인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접근도 가능하게 한다. 어떤 대상이 언어화된다는 것은 언어적 관례와 규범에 따라 범주화 된다는 것을 말한다. 언어적 관례와 규범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관계속에서 형성된다. 즉 하나의 텍스트는 수많은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속에서 만들어진다. 다른 텍스트들은 한 텍스트의 소재인 동시에 관례이고 규범이 되어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수많은 다른 텍스트는 한 텍스트의 콘텍스트다.
텍스트의 저자는 언어적 관례와 사회적 콘텍스트 안에서 의미를 생산하고 조직한다. 미셸 푸코는 이러한 의미를 생산하고 조직하는 방식 내지는 일련의 규칙을 '담론'이라고 이름 붙였다. 담론으로서의 언어는 사회적 세계의 인간 경험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지식의 양식을 구성한다. 담론은 '실재를 구성하는 힘'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담론의 특징은 역사의 추동력에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다.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카가 말하는 사회가 아니라 담론을 구성하는 언어와 문화라는 것이다.
언어로의 전환 이후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역사에 대한 정의는 정당성과 실효성을 상실했다. 과거의 사실은 없다. 역사는 언어와 문화에 의해 움직인다. 결국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일 뿐이며 역사가의 담론일 뿐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역사 정의에 대해 전통적 역사학자들은 역사학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빼앗고 역사학의 해체를 가져올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역사학자들은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공간으로 역사를 인식한다. 역사 사실 재현은 불가능하지만 텍스트의 가치를 적극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 Ferdinand de Saussure (1857. 11. 26 ~ 1913. 2. 22) 스위스의 언어학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