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는 실증사학의 사실 추구에 관한 맹목적인 관점에 대해 두가지 고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첫째로 역사가의 일차적 관심이 사실검증에 머무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역사가가 과거 사실의 검증을 잘했다고 칭찬받는 것은 좋은 재료를 이용해 집을 짓고 있는 건축가를 칭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건축가의 최종 목표는 좋은 집을 짓는 것이지 좋은 건축자재를 마련하는 것은 필요조건이지 본질적 기능은 아니라고 밝힌다.

둘째로 과거의 사실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 자체의 성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의 선험적인 결정을 통해 비롯된다는 점이다. 시저가 루비콘강을 건넌것이 역사적 사실(a historical fact)이 되는 것은 역사가들이 그 나름의 이유 때문에 결정한 것이며 그 이전이나 이후에 루비콘 강을 건넌 다른사람들의 일은 사실이지만 역사적 사실이 되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30분전에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간것은 사실이지만 역사가의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되지 못한다. 즉 과거의 사실은 역사가가 그 사실에 부여한 중요성에 의해서만 역사적 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 결국 해석의 문제라면 오늘날 전해지는 과거의 사실은 그시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것만이 선택되고 결정되어져 전해졌다는 말이된다. 중세의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는 역사책을 보면 이것이 진실인지 의문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중세의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 대부분은 종교의 이론을 공부하고 실천하던 종교인이었다. 따라서 종교와 관련된 모든것은 기록하고 그 밖의 일은 소홀히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지금와서 이런 의문을 가진다고 해도 중세시대가 종교의 영향이 강했다는 인상을 무너트릴 수는 없다. 종교와 관련없는 수많은 사실들은 그 당시의 선택에 의해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읽고 있는 역사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 하더라도,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라 널리 인정된 일련의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G. Barraclough, <History in a Changing World(1955)>


사료의 잔존 여부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 있는 사료는 기록한 사람의 주관에 의해 왜곡되어진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카가 처음한 것이 아니라 크로체, 콜링우드 등에 의해 먼저 지적되었다.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 - Benedetto Croce


역사는 역사가의 경험이다. 역사는 오로지 역사가에 의해서만 '만들어 진다'. 역사를 쓰는 것만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 M. Oakeshott


콜링우드는 <The Idea of History>를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역사철학은 '과거 그 자체'나 '과거 그 자체에 대한 역사가의 사상'이 아니라 '상호관계에 있는 그 양자'를 다루는 것이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어느 의미에서는 아직도 현재속에 살아 있는 과거이다. 그러나 과거의 행위는 역사가가 그 배후에 깔린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에게 있어 죽은것, 곧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사상의역사'이며 또한 '역사는 역사가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역사의 사상이 그의 마음속에 재현된 것'이다.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행해지는 과거의 재구성은 경험적인 증거에 의거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구성 자체는 경험적 과정이 아니며, 또한 사실의 단순한 나열에 그칠수도 없다. 오히려 재구성 과정은 사실의 선택과 해석을 지배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이다.

카는 이러한 콜링우드의 주장을 세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역사의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코 순수한 것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다. 역사의 사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하여 항상 굴절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역사책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책에 실린 사실들보다 그 책을 쓴 역사가에 대해 일차적인 관심을 두어야 한다.

둘째, 역사가는 자기가 연구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행위 밑에 깔려있는 사상을 상상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공감이라 하지 않고 '상상적인 이해'라고 하는 것은 공감이라는 말에는 동의를 함축하는 것으로 생각 될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오직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과거를 볼 수 있고 과거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자기 시대에 속한 사람으로, 인간 존재라는 조건에 의해서 자기시대에 속박당한다. 역사가가 사용하는 말부터 떼놓을 수 없는 시대적인 함축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가는 이러한 말들을 이 함축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카는 이러한 콜링우드의 주장에 동의하는 한편 몇가지 위험성을 경고했다. 역사가가 사실을 지배하게 되면 결국 어떤 객관적 역사든 배제하게 되어 역사는 역사가가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지독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어 역사란 단지 어린아이의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되어버리거나  무수한 의미가 있어 어느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없는 결국 모든게 마찬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가장 큰 위험성은 현재의 문제에 대한 열쇠로 과거의 문제를 연구한다면 순전히 실용주의적인 사실관에 빠지게되어 버린다는데 있다. 이러한 주장은 현재의 어떤 목적에 빗대어 과거의 사실을 해석하는 즉 역사의 사실은 없고 해석이 전부가 되어버리는 상황을 낳게된다.

카는 콜링우드의 주장을 빌려 실증사학을 비판하고 또 콜링우드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역사가와 사실과의 관계는 평등의 관계이고 서로 주고 받는 관계라고 말한다. 역사가는 자기의 해석에 따라 사실을 선택하고 사실에 해석을 형성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매달려있다. 사실과 해석중 어느 한쪽만을 우위에 놓는것은 불가능하다. 사실은 과거에 속해있고 역사가는 현재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사실과 역사가의 해석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카의 역사의 정의가 나온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또한 카는 진보로서의 역사를 주장한다. 과거 사실이 역사적 사실의 위치로 올라서는데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미래성이다. 역사가는 미래의 목적에 입각하여 과거의 사실들 중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적절한지를 판단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현재가 과거로 되면서 새로운 미래의 목적이 등장하게 된다. 그에 따라 과거에 외면되었던 새로운 사실들이 역사적 사실이 되면서 역사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깊어진 통찰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원한다면 과거의 의미를 역사 밖의 초이성적인 힘에 의존하게 하여 역사를 신학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또한 그럴 생각만 있다면 역사를 문학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의미에서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는 역사 자체에서 방향감각을 찾아내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어디에선가 왔다는 믿음은 우리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다. 미래를 향해 진보해 가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회는 재빨리 과거에 있어서의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한 관심도 상실할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랑케와 그 비판자들이 과거에 매달려 있었던 것에 비하면 카는 진보로서의 역사 즉 미래를 바라보며 역사의 의미를 찾았다.


참고 Edward Hallett Carr, <역사란 무엇인가>